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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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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전)은 2000년 12월 5일 발족한 내각으로, 2001년 1월 6일 중앙 성청 개편을 앞두고 단행되었다. 수상 경험자인 미야자와 기이치와 하시모토 류타로를 각료로 기용하여 "중량급" 진용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자유민주당 간사장 노나카 히로무의 사임 이후 고가 마코토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며,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에는 나카소네 히로후미가 임명되었다. 내각은 법무총괄정무차관 등 총괄정무차관 제도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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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전)
내각 정보
내각 이름제2차 모리 개조내각
일본어 이름第2次森改造内閣
대수86
수상 이름모리 요시로
내각 구성
성립 연도2000년
성립 월일12월 5일
종료 연도2001년
종료 월일1월 6일
여당자유민주당
공명당
제2차 모리 개조내각
제2차 모리 개조내각 사진
각료 명단수상 관저 홈페이지

2. 성립 배경

2001년 (헤이세이 13년) 1월 6일에 실시될 중앙 성청 개편을 앞두고 대신·장관 간, 정무 차관 간의 겸임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는 개편으로 각 성 대신 등의 새로운 보직 사령이 발출될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전 내각이 각료 대기조를 많이 기용한 "재고 정리"라고 불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수상 경험자인 하시모토 류타로, 장래의 리더 후보로 여겨졌던 누카가 후쿠시로, 마치무라 노부타카, 다카무라 마사히코 등을 새롭게 입각시키고, 유임된 미야자와 기이치, 히라누마 다케오, 고노 요헤이 등과 함께 "중량급"의 진용이라고 불렸다. 한편, 2000년 (헤이세이 12년) 11월에 일어난 가토의 난의 중심이 된 가토파·야마자키파 의원에서는 각료나 당 간부가 기용되지 않았다. 다카무라는 "모리 요시로 총리에게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반년 전에 구 가와모토파를 계승한 참이라, 각료 경험이 없는 젊은이를 밀어 넣으려 했지만, 모리 씨는 '당신이 꼭 들어가 줬으면 한다'고 양보하지 않았다. 가토 고이치 씨의 반란이 일어난 직후의 인사였기 때문에, 중량급의 얼굴로 하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1]

수상 경험자인 미야자와·하시모토 두 사람이 각료가 되었다. 수상 경험자가 두 명 각료로 입각하고 있는 내각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해군대신의 요나이 미츠마사·국무대신의 고노에 후미마로) 이후 56년 만이었다. 또한, 자유민주당 총재 경험자는 3명이 입각하고 있었다.

"가토의 난"을 진압한 간사장노나카 히로무는 12월 1일, "간사장으로서 혼란의 책임을 진다"며 사임을 표명했다. 후임으로는 국회대책위원장인 고가 마코토를 추천했고, 모리는 이를 받아들였다[2]

3. 각료 명단

과학기술청 장관--마치무라 노부타카국립국회도서관 연락조정위원회 위원후생대신
노동대신--사카구치 지카라연금 문제 담당농림수산대신--야쓰 요시오첫 입각통상산업대신--히라누마 다케오국제 박람회 담당,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취임 순위 제4위유임운수대신
건설대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국토청 장관--하야시 히로코 (오기 지카게)신 도쿄 국제공항 담당, 총합 교통 대책 담당, 연구・학원 도시 담당, 토지 대책 담당, 수도 기능 이전 담당유임환경청 장관--가와구치 요리코지구 환경 문제 담당유임내각관방장관--후쿠다 야스오남녀 공동 참가 담당,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취임 순위 제1위유임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이부키 분메이위기 관리 담당금융재생위원회 위원장--야나기사와 하쿠오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취임 순위 제5위방위청 장관--사이토 도시쓰구첫 입각경제기획청 장관--누카가 후쿠시로신천년기 기념행사 담당, 정보통신기술(IT) 담당오키나와 개발청 장관--하시모토 류타로행정 개혁 담당, 오키나와 담당국무대신--사사카와 다카시종합 과학기술 회의 담당첫 입각우정대신
자치대신
총무청 장관--가타야마 도라노스케첫 입각






'''소속 정당・출신'''

자유민주당 (모리 파)자유민주당 (하시모토 파)자유민주당 (다카무라 파)자유민주당 (고노G)자유민주당 (에토・가메이 파)자유민주당 (호리우치 파)자유민주당 (가토 파)자유민주당 (야마자키 파)자유민주당 (무파벌)공명당보수당중앙 성청・민간




4. 내각관방부장관 및 내각법제국 장관

자유민주당
(모리 파벌)

60픽셀
우에노 코세이참의원
자유민주당
(모리 파벌)후루카와 테이지로사무 담당후생 사무 차관내각위기관리감안도 타다오경찰관료내각법제국장관츠노 오사무대장관료


5. 내각총리대신 보좌관

나카소네 히로후미는 교육 개혁을 담당하는 내각총리대신보좌관이었다. 참의원 의원으로, 에토・카메이파 소속이었다.

6. 총괄정무차관

1999년 12월 6일에 개조 내각이 발족하였다.[1]

1999년 9월 20일, 부대신 제도를 염두에 둔 정무차관의 권한 강화에 관한 법 개정이 있었다. 같은 날 이후 "○○총괄정무차관"(1개 성청에 복수 임명되는 경우에는 수석자만)으로 호칭하게 되었다.[1] 이 법 개정에서는 권한 부분만 개정되었고 관직명까지는 개정되지 않아, 각의에서의 협의라는 형태로 "총괄" 호칭이 도입되었다. 따라서 법적 근거가 필요한 임명 사령에는 "총괄"을 포함하지 않는 정식 관직명이 사용되었다.[1]

이후 1개월 뒤 부대신 제도로 이행하게 되어, 중앙 성청 개편 전의 제2차 모리 개조 내각에 한정하여 각의에서의 합의에 기초하여 정무차관 전원에게 "총괄"이 관명으로 부여되었다.[1]

부처총괄정무차관
법무총괄정무차관나가세 마사토
외무총괄정무차관아라키 기요히로, 에토 세이시로
대장총괄정무차관무라카미 세이이치로, 와카바야시 마사토시
문부총괄정무차관가와무라 다케오
후생총괄정무차관마스야 게이고
농림수산총괄정무차관마쓰오카 도시카쓰, 다나카 나오키
통상산업총괄정무차관나카야마 나리아키, 마쓰다 이와오
운수총괄정무차관, 홋카이도 개발총괄정무차관이즈미 신야
우정총괄정무차관고사카 겐지
노동총괄정무차관마스다 도시오
건설총괄정무차관, 국토총괄정무차관다카하시 이치로
자치총괄정무차관, 총무총괄정무차관엔도 가즈요시
총리부총괄정무차관, 경제기획총괄정무차관사카이 다카노리
금융재생총괄정무차관무라이 히토시
방위총괄정무차관이시바 시게루
과학기술총괄정무차관오노 이사오
환경총괄정무차관구쓰카케 테쓰오
오키나와 개발총괄정무차관나카무라 마사하루


7. 평가 및 영향

모리 내각은 이전 내각이 각료 대기조를 많이 기용하여 '재고 정리'라고 불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시모토 류타로 등 총리 경험자와 누카가 후쿠시로, 마치무라 노부타카, 다카무라 마사히코 등 장래의 리더 후보들을 새로 입각시키고, 미야자와 기이치 등 유임된 각료들과 함께 '중량급' 진용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았다.[1] 그러나 2000년 11월에 일어난 가토의 난의 중심이었던 가토파와 야마자키파 의원들은 각료나 당 간부로 기용되지 않았다.[1] 다카무라는 모리 총리가 자신을 법무장관으로 임명한 이유에 대해, 가토의 난 직후였기 때문에 중량급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1]

총리 경험자인 미야자와와 하시모토 두 명이 각료로 입각한 것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이후 56년 만이었다. 또한, 자유민주당 총재 경험자 3명이 입각했다.

가토의 난을 진압한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은 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후임으로는 고가 마코토 국회대책위원장이 임명되었다.[2]

참조

[1] 뉴스 司法制度改革 法科大学院構想に懸念 「予備試験」の道 確保に目配り 日本経済新聞 2017-08-16
[2] 웹사이트 政治・国際 平成政治の興亡 私の見た権力者たち「密室談合」の森政権と前代未聞の「加藤の乱」平成政治の興亡 私が見た権力者たち(11)星浩 政治ジャーナリスト https://webronza.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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