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전)은 2000년 12월 5일 발족한 내각으로, 2001년 1월 6일 중앙 성청 개편을 앞두고 단행되었다. 수상 경험자인 미야자와 기이치와 하시모토 류타로를 각료로 기용하여 "중량급" 진용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자유민주당 간사장 노나카 히로무의 사임 이후 고가 마코토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으며,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에는 나카소네 히로후미가 임명되었다. 내각은 법무총괄정무차관 등 총괄정무차관 제도를 운영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모리 요시로 - 세이와 정책연구회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1979년 후쿠다 다케오에 의해 창설되어 여러 총리대신을 배출하며 자민당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인해 2024년 1월 파벌 해산을 결정했다. - 모리 요시로 - 제2차 모리 내각
제2차 모리 내각은 2000년 4월 5일부터 2001년 4월 26일까지 모리 요시로 총리에 의해 조직된 자민당, 공명당, 보수당의 연립 내각이며,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잦은 실언과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여 모리 총리가 사퇴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 2001년 일본 -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1차 고이즈미 내각은 2001년 4월 26일에 발족하여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며, 2002년 9월 30일 개각을 통해 일부 각료가 변경되었다. - 2001년 일본 - 2001년 월드 게임
2001년 월드 게임은 일본 아키타에서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개최된 국제 종합 스포츠 대회로,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가 허용되었지만, 과도한 예산, 준비 부족, 정치적 논란 등과 함께 스포츠 인프라 확충 및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으나 시설 유지 관리라는 과제를 남겼다. - 2000년 일본 - 제2차 모리 내각
제2차 모리 내각은 2000년 4월 5일부터 2001년 4월 26일까지 모리 요시로 총리에 의해 조직된 자민당, 공명당, 보수당의 연립 내각이며,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나 잦은 실언과 스캔들로 지지율이 하락하여 모리 총리가 사퇴하고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후임으로 선출되었다. - 2000년 일본 - 오부치 내각 (제2차 개조)
오부치 내각 (제2차 개조)은 1999년 11월 20일에 발족하여 오부치 게이조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고, 2000년 4월 오부치의 뇌경색으로 아오키 미키오가 총리 임시대리를 수행했으며, 경제, 사회, 외교 정책 등을 추진했으나 오부치의 뇌경색과 후임 선출 과정에서 비판을 받았다.
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 (중앙 성청 개편 전) | |
---|---|
내각 정보 | |
내각 이름 | 제2차 모리 개조내각 |
일본어 이름 | 第2次森改造内閣 |
대수 | 86 |
수상 이름 | 모리 요시로 |
내각 구성 | |
성립 연도 | 2000년 |
성립 월일 | 12월 5일 |
종료 연도 | 2001년 |
종료 월일 | 1월 6일 |
여당 | 자유민주당 공명당 |
![]() | |
각료 명단 | 수상 관저 홈페이지 |
2. 성립 배경
2001년 (헤이세이 13년) 1월 6일에 실시될 중앙 성청 개편을 앞두고 대신·장관 간, 정무 차관 간의 겸임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는데, 이는 개편으로 각 성 대신 등의 새로운 보직 사령이 발출될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과학기술청 장관
전 내각이 각료 대기조를 많이 기용한 "재고 정리"라고 불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수상 경험자인 하시모토 류타로, 장래의 리더 후보로 여겨졌던 누카가 후쿠시로, 마치무라 노부타카, 다카무라 마사히코 등을 새롭게 입각시키고, 유임된 미야자와 기이치, 히라누마 다케오, 고노 요헤이 등과 함께 "중량급"의 진용이라고 불렸다. 한편, 2000년 (헤이세이 12년) 11월에 일어난 가토의 난의 중심이 된 가토파·야마자키파 의원에서는 각료나 당 간부가 기용되지 않았다. 다카무라는 "모리 요시로 총리에게 법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반년 전에 구 가와모토파를 계승한 참이라, 각료 경험이 없는 젊은이를 밀어 넣으려 했지만, 모리 씨는 '당신이 꼭 들어가 줬으면 한다'고 양보하지 않았다. 가토 고이치 씨의 반란이 일어난 직후의 인사였기 때문에, 중량급의 얼굴로 하고 싶었던 것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1]。
수상 경험자인 미야자와·하시모토 두 사람이 각료가 되었다. 수상 경험자가 두 명 각료로 입각하고 있는 내각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내각 (해군대신의 요나이 미츠마사·국무대신의 고노에 후미마로) 이후 56년 만이었다. 또한, 자유민주당 총재 경험자는 3명이 입각하고 있었다.
"가토의 난"을 진압한 간사장인 노나카 히로무는 12월 1일, "간사장으로서 혼란의 책임을 진다"며 사임을 표명했다. 후임으로는 국회대책위원장인 고가 마코토를 추천했고, 모리는 이를 받아들였다[2]。
3. 각료 명단
-- 마치무라 노부타카 국립국회도서관 연락조정위원회 위원 후생대신
노동대신-- 사카구치 지카라 연금 문제 담당 농림수산대신 -- 야쓰 요시오 첫 입각 통상산업대신 -- 히라누마 다케오 국제 박람회 담당,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취임 순위 제4위 유임 운수대신
건설대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국토청 장관-- 하야시 히로코 (오기 지카게) 신 도쿄 국제공항 담당, 총합 교통 대책 담당, 연구・학원 도시 담당, 토지 대책 담당, 수도 기능 이전 담당 유임 환경청 장관 -- 가와구치 요리코 지구 환경 문제 담당 유임 내각관방장관 -- 후쿠다 야스오 남녀 공동 참가 담당,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취임 순위 제1위 유임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이부키 분메이 위기 관리 담당 금융재생위원회 위원장 -- 야나기사와 하쿠오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 취임 순위 제5위 방위청 장관 -- 사이토 도시쓰구 첫 입각 경제기획청 장관 -- 누카가 후쿠시로 신천년기 기념행사 담당, 정보통신기술(IT) 담당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 하시모토 류타로 행정 개혁 담당, 오키나와 담당 국무대신 -- 사사카와 다카시 종합 과학기술 회의 담당 첫 입각 우정대신
자치대신
총무청 장관--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첫 입각